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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0042 <밀회> 안판석 PD “단 한 개의 음표, 단 하나의 손동작도 틀리지 않았다.” (조민준, <맥스무비>, 2014)

Photo by  Andrik Langfield  on  Unsplash

밀회가 방영된지 벌써 5년이 넘게 시간이 흘렀다. 사실은  맥스무비의 안판석 PD님 인터뷰가 이곳 인터리슨을 만든 계기이다. 나만 보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어딘가에 올리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서 다시 봐도 너무 좋은 인터뷰니까(그래서 인터뷰를 묵혔다가 다시 보는 것을 좋아한다). 이걸 올릴 때가 언젠가 오기를 바랬는데, 드디어 올리네. :)

 

어떤 것을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을 알게 되는 것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인터뷰와 메이킹 필름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늘 그 뒷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긴다. 안판석 PD님은 어느 기사를 읽어도 그 성정이나 실력이 대한민국에서 최고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조민준 님도 인터뷰어의 색이 물들지 않게 너무 인터뷰를 잘 해주셨네. 그러고 보니 한 때 즐겨보았던(하지만 지금은 폐간된 ㅠㅠ) <드라마틱>의 편집장셨구나. 인터뷰의 Question과 Answer가 명확히 안 나눠져 있어서(읽어보면 문맥상 알 수 있지만) 마치 두 명이서 같이 치는 피아노(1piano 4hands)처럼 좋은 연주 같다. 



그 장면에서 선재가 반하는 것은 단순히 혜원의 여성적인 매력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줬다는 인정욕구의 충족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도 같다. 그렇다. 그 대목을 두고 정성주 선생과 이야기하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과거 시인이었던 영화감독 유하가 내 대학시절 친구다. 어느 날 수업시간에 나란히 앉아 있는데, 듣기 싫은 수업이다 보니 걔는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고 있더라. 나도 수업을 듣지 않던 중이라 그림 그리는 걸 보게 되었는데 옆에 글자들이 적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시였다. 아주 잘 썼더라. 나는 고등학교 때 문학소년이어서 문학비평 어휘도 많이 알았다. 고작 스물 세 살짜리가 전문용어를 쓰며 진지하게 말하는 건 부끄러운 일인데도, 그 시를 보고 유하에게 진지하게 얘길 해버렸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참 잘 쓴 시라고. 그러자 얼굴이 빨개지더니 중학교 때부터 시를 써왔다고 고백하면서 자기가 쓴 다른 시들을 보여줬다. 참 오묘한 순간이다. 우연히 시를 보고 내가 진지하게 평가를 해 준 순간 그의 내면에서 뭔가가 확 열려버린 거다. 그리고 그게 걔의 운명을 바꿨다.

 


또한 모든 예술은 휴머니즘을 위해 존재하는 건데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인권이나 일상의 행복이 무시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작품의 질, 성공과 실패 이런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거라고 본다. 철저하게 쉴 시간을 주고, 잘 시간을 주고, 씻을 시간을 주고, 노닥거릴 시간을 주고. 그걸 지키는 게 첫 번째 목표다. 내가 잘 한 것은 그걸 지켰다는 거다. 그걸 자랑하고 싶다. 너무 잠을 잘 자고, 너무 맛있게 먹고, 너무 즐겁게 노닥거리면서 끝까지 해냈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든다.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물리적으로 공이 많이 들 수밖에 없어 보이는 작품인데. 아까 말했던 것들이다. 음악을 얼마만큼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왔을 때,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는 것. 2~30초라는 식이 아니고 22초.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실수하면 그 감각이 몸에 새겨진다. 만약 이 장면에서 엑스트라가 몇 명 필요한가? 2~30명이 아니고 22명. 이렇게 정했는데 결과적으로 부족하거나 넘치면 그게 구체적으로 몸에 각인된다. ‘이건 25명이 맞구나’라는 식으로. 그렇게 음악의 분량, 필요한 사람, 필요한 장소 등등 구체적으로 판단하고 결과를 보면서 훈련을 쌓아 왔으니까 몸에 새겨진 게 많은 거다. 이젠 틀릴 일도 별로 없고, 시간 걸릴 일도 없고, 일이 너무 빠른 거다.

그렇듯 정교한 예측치 또한 경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일 텐데. 27년을 했다. 조연출 첫날부터 쌓인 게 여기까지 온 거다. 만약 처음부터 “엑스트라는 2~30명 정도?” 이런 식으로 대충대충 판단해 왔다면 10년, 100년을 해도 늘지가 않았을 거다. 한번이라도 결과에 구체적으로 책임을 져 보면 그 다음부터 같은 실수는 없다. 드라마 연출이 얼마나 복잡한가. 모든 파트에서 그렇게 하나씩 연습해 나가면 정말 정확해진다. 이다음엔 또 나아지겠지.

 

 

 

출처: 

▶ <맥스무비> 단독 인터뷰 ①| <밀회> 안판석 PD “단 한 개의 음표, 단 하나의 손동작도 틀리지 않았다.”

▶ <맥스무비> 단독 인터뷰 ②| <밀회> 안판석 PD “최고의 리얼리티가 최고의 판타지를 만든다.”

▶ <맥스무비> 단독 인터뷰 ③| <밀회> 안판석 PD “두드러지는 스타일이 없어야 진짜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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