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소설이 속속 충무로행을 타고 있다. 동시에 그의 소설은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다. 두 가지 번역 사이, 세계적인 작가를 꿈꾸는 김영하의 마음을 잡아 끄는 것은 당연히 영화가 아니다.
한승희 기자 <내 머리 속의 지우개>라는 책을 각색했다던데 어쩐 일로 각색까지 했나?
김영하 책? 아, 영화계에서는 시나리오를 책이라고 하지. 처음에 영화인들과 얘기하면서 책이라는 말을 못 알아들어서 어리둥절한 적이 많았다.
한승희 기자 영화인들이 제본된 글이라고는 시나리오밖에는 안 읽어서 시나리오를 책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물론 엄청난 독서광들도 많지만.
김영하 그래도 영화인들이 내 책은 많이 읽는 것 같다. 내 별명이 한때 ‘충무로 신경숙’이었다. 한 30만 부씩 나가는 걸로 오해하더라.
박아녜스 기자 얼마 전 서점에서 데뷔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넘겨 보니 18쇄로 찍혀 있더라. 베스트셀러 작가 아니었나?
김영하 그게 다 1천 부씩 찍어서 그렇다.(웃음) 그래도 난 ‘2만 부라 비웃지 마라’ 그런다. 산문집까지 모두 9권의 책을 냈는데 한번도 절판된 적이 없다. 매년 1천 부라도 찍는다. 영화는 몇 달 안에 끝나지만 소설은 생명력이 길다. 작가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승희 기자 어쨌거나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건축가 지망생 철수(정우성)와 철수가 일하는 회사의 사장 딸 수진(손예진)이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는 멜로드라마’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각색을 했다는 게 의외다. ‘신세대 소설가’ 김영하의 크레딧치고 너무 닭살스럽다.
김영하 그건 티저다. 뚜껑을 열면 기존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든 성숙한 멜로드라마가 될 것이다. 영화에서 철수는 소년으로 시작하지만 가족의 가치, 용서, 화해, 이런 전통적인 가치들과 정면 승부를 벌이면서 마지막에는 어떤 중요한 것들을 긍정하게 된다. 마치 <대부>의 마이클 콜레오네처럼.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멜로영화지만 사람이 안 죽는다는 거다.
한승희 기자 제목은 사람이 많이 죽는 무슨 공포영화 같다.
김영하 그래서 내가 이재한 감독에게 ‘사랑의 기쁨’ 정도로 가자고 우겼는데.(웃음)
박아녜스 기자 이재한 감독과의 인연으로 각색 작업을 하게 된 것인가?
김영하 2001년부터 이재한 감독과 <레드 스킨>이라는 시나리오를 썼다. 일은 잘 안 풀렸지만 함께 작업하면서 호흡도 잘 맞고 신뢰도 많이 쌓였다. 내 지론 중의 하나가 ‘내 주변 사람이 행복해지면 나도 행복해진다’는 건데, 이재한 감독을 한국에서 꼭 데뷔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미국에서 찍은 <컷 런스 딥>(1998) 이후 한국에 건너와 오랫동안 실의에 빠져 살았다. 아직 발휘되지 못한 능력이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이런 사람이 충무로에 들어와서 떠돌다가 결국 원한을 품고, 마치 <말죽거리 잔혹사>의 현수처럼 “대한민국 영화계 좆까라 그래!”하면서 미국으로 떠나면 그 사람에게나 한국 영화계에나 손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상당히 바쁠 때였는 데도 불구하고 3고부터 합류했다.
박아녜스 기자 멜로영화 각색을 해보니 어떻던가?
김영하 내가 최루성 멜로에 상당히 재능이 있다는 걸 새롭게 깨달았다.
한승희 기자 <오빠가 돌아왔다> 출간 인터뷰 중에 앞으로 사랑에 대한 소설을 쓰겠다는 부분이 있었는데,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영향인가?
김영하 그럴 수도 있다. 원래 내 오래된 꿈이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보바리 부인>같이 당대 도덕의 문제를 건드리는 완성도 높은 연애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낡지 않은 방식으로 써야지 하고 시작하면, 매번 주인공들이 토막 살인을 하거나 '퍽치기'를 하는 등 통제 불가능한 상황으로 빠져서 아직까지 못 썼다.(웃음)
한승희 기자 나는 <검은 꽃>을 멜로로 봤다. 고아 소년과 몰락한 왕족의 후손이 격동의 시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로.
김영하 약간 그런 면이 있기는 하다.
박아녜스 기자 원래 <검은 꽃>이 이재한 감독과 영화 아이템을 의논하다가 구상한 소설이라던데.
김영하 비행기에서 한 얘기가 있었는데 이재한 감독은 기억도 잘 못할 거다. 도저히 영화화할 수 없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가 판권을 샀다. 얼뜻 보면 초반은 <타이타닉>이고, 후반은 <애니 깽>같지만 이 소설이 꽤 복잡하다. 구한말부터 시작해 너무 긴 시간을 담고 있고 주인공도 딱히 없는 데다 영화로 보여 주려면 100년 전 제물포 풍경도 재현해야지, 바다와 범선도 나와야지, 멕시코 사탕수수 농장도 찍어야지, 과테말라 밀림의 전투 신도 찍어야지 돈 들어갈 데가 많다. 원작자로서 잘 생각해보고 사라고 했는데 복안이 있다며 계약하더라. 어떤 영화가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영화에서 시작된 아이디어가 소설로 갔다가 다시 영화로 온 셈이 됐다.
한승희 기자 <검은 꽃>은 직접 시나리오도 쓰나?
김영하 차대표가 말하길 <검은 꽃>은 한국에서 시나리오 쓸 사람이 많지 않은 데다 시나리오 개발하는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며 나한테 2고까지라도 쓰라고 했다. 어느 작가한테 구한말 역사를 공부시키고, 멕시코 혁명사 공부시켜서 뽑아내냐고. 한국영화는 바빠서 그럴 여력이 없다더라.(웃음) 하긴 나도 <검은 꽃> 쓰느라 멕시코 여행한 것도 다 김기덕 감독 덕분이다. LJ필름에서 <나쁜 남자>로 번 돈으로 <주홍글씨> 판권을 샀는데, 그 돈으로 내가 소설을 쓴 거니까.
한승희 기자 <주홍글씨>는 어떤 소설이 원작인가?
김영하 <거울에 대한 명상> <사진관 살인사건> <호출> 세 편을 엮어서 시나리오 작업을 한 거다. 촬영을 시작할 때가 됐는데 아직 시나리오를 못 봤다.
박아녜스 기자 원작자가 시나리오를 못 볼 수도 있나?
김영하 내 입장은 주기 전에 잘 생각하고, 주고 난 다음에는 믿고 맡기는 거다. 영화사나 감독에게 믿음이 있어서 준 건데, 내가 뭐 <해리 포터>의 J. K. 롤링도 아니고 일일이 간섭할 필요가 있나.
한승희 기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원작으로 한 <파괴>는 언제 개봉하나?
김영하 나도 모른다. 개봉관에 걸 수나 있으려나….
한승희 기자 자신의 소설이 영화의 재료 문학으로서 어떻게 요리가 되건 무관심하다는 뜻인가? 원작 제공뿐 아니라 같이 영화하자는 제의를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영화에 관심 없나?
김영하 난 영화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주변에 영화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작업 환경 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나는 도저히 그런 노동 강도로는 인생을 살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영화 쪽으로 가려고 했으면 훨씬 더 빨리 갔을 거다. 하지만 난 소설을 쓰는 사람이다. 영화가 활황이고 문학이 침체기라지만 문학에도 봄날은 온다. 나로서는 소설 쓰고 원작 파는 게 내 부가가치를 제일 높이는 일이다.
한승희 기자 한국영화가 한국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주변 장르의 자원을 문어발처럼 빨아들이고 있는데 거기에 빨려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뜻인가? 전에는 영화 글도 많이 쓰곤 했는데.
김영하 밖에서는 인정을 안 해줘서 큰소리로 얘기는 안 하지만 나나 문학하는 사람들에게는 내밀한 자부심이 있다. 지금은 영화가 활개를 치지만 10년이 지나면 우리는 남아 있을 것이다. 나이 60이 되도 나는 소설을 쓰고 있겠지만, 지금 화려하게 레드 카펫 밟고 있는 영화감독들이 과연 60에도 나처럼 작품을 하고 있을까? 말했다시피 문학에는 생명력이 있다. 영화는 화면으로 보여지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빨리 낡는다. 그리고 영화는 감독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성공 여부가 결정되는 게 아니지만 소설은 한 작가가 자기 관리 잘하고 최선을 다하면 기본은 한다.
한승희 기자 소설 쓰지 말고 영화하라는 뜻은 아니다. 70년대 최인호, 80년대 이문열, 90년대 장정일이 한국 영화계에 주었던 어떤 것을 김영하도 주지 않을까, 조금 더 적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이전보다 더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김영하 좋은 원작을 쓰는 정도가 내 몫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정말 영화가 될 것을 염두에 두고 소설 쓰는 일은 없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거나 아니거나는 작가의 의사와 반대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의 문학적 스승이 밀란 쿤데라인데, 쿤데라 역시 절대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할 소설을 쓰리라, 그게 꿈이었지만 결국 영화로 많이 만들어졌다. 인물이 매력적이건, 이야기가 매력적이건 어떤 흡인력이 있으면 영화 쪽에서는 그걸 갔다 쓰려는 것 같다. 어떻게든 영화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더라. 이번에 출간한 <오빠가 돌아왔다>는 ‘오빠가 돌아왔다’ ‘마지막 손님’ ‘그림자를 판 사나이’ 세 편이 판권 교섭 중이다. 내가 보기엔 도저히 영화로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박아녜스 기자 동감이다. <오빠가 돌아왔다>의 소설들은 예전과는 달리 스토리가 상당히 비어 있고 작법도 에둘러치는 인상인데.
김영하 맞다. 그야말로 문학적인 소설들이다.
한승희 기자 일단 인기 작가의 소설은 사고 보자는 경향도 한몫을 하는 게 아닐까.
김영하 하긴 요즘 재미있다는 소설들은 다 영화 판권이 팔리는 모양이다. 어쨌든 나야 나쁠 건 없다.
한승희 기자 소설에 종종 영화인들이 등장하는데 실존 인물이 모델인가?
김영하 ‘마지막 손님’에서 여고생 시체 보러온 사람은 봉준호 감독이 모델이었다.
한승희 기자 봉준호 감독은 이혼 안 했는데?
김영하 약간 변형했다. 난 실제 인물을 바로 가져다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한승희 기자 <오빠가 돌아왔다>의 ‘너의 의미’에서 시나리오 작업을 빙자해 신인 소설가를 농락하는 삼류 영화감독도 나온다. 실제 인물이 아니라면 여자를 정복했다고 생각했던 감독이 소설가가 진지한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덫에 걸린다는 이야기가 영화와 문학의 관계를 은유적으로 그린 건가?
김영하 쓸 때는 잘 몰랐는데 이남호 선생이 평을 하면서 ‘너의 의미’는 그냥 연애 얘기가 아니라 영화를 짝사랑하는 문학의 얘기라고 하더라. 문학은 영화를 짝사랑하지만 영화는 왜 문학이 영화를 짝사랑하는지를 모른다. 지금 영화와 문학 사이에는 그런 게 있다. 예를 들어 문학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면 소설 얘기, 시 얘기 안 하고 줄창 영화 얘기만 하지만 영화인들은 술 마시면서 문학 얘기 안 한다.(웃음)
박아녜스 기자 90년대 당신은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내는 소설에 능했다. 한번도 소설에 등장하지 않았던 인터넷 게임을 끌어낸다든가, 삐삐를 소재로 한다든가, 피뢰침이 나온다든가. ‘영상세대’ ‘신세대’ 소설가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김영하 꼭 트렌드를 리드하겠다는 의도는 없었는데 기존의 문학에서 문학의 소재로 고려하지 않은 것들을 시도할 때마다 충격을 준 거 같다.
박아녜스 기자 그런데 <아랑은 왜>에 와서는 고전으로 가기도 하고, <검은 꽃>으로는 역사 소설에 도전하는 것 같기도 하고. 행보를 종잡기가 어렵다.
김영하 <아랑은 왜>를 쓰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다 미쳤다고 했다. 너는 현대 소설에 가까이 있는 앤데 왜 전설 얘기를 하려고 하냐? <검은 꽃>을 쓸 때도 갑자기 왜 역사 소설이냐? 그런데 그 작품들이 나오고 나서 고전이나 역사에 뿌리를 둔 소설이 많이 나왔다. 개인적으로는 <검은 꽃>을 통과하면서 이 정도의 스케일의 장편 소설을 내 툴로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제대로 들어선 것 같다.
박아녜스 기자 어떤 길을 가고자 하나?
김영하 난 내가 한국 문학의 메인 스트림과는 다른 새로운 영역들을 확장해가는 전위라고 생각한다. 늘 내 소설이 번역될 것을 염두에 두고 썼는데, 지난해 아이오아대학에서 초청받아 연수를 하면서 내 소설이 세계적으로 통용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거기서 ‘카프카 <성>의 퍼니 버전’이라는 평을 들었다. 내 소설은 토속적인 정서가 강하지 않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있는 나라 독자들은 다 이해한다. 소설에도 글로벌 스탠더드가 있다면, 유니크하면서도 글로벌한 소설을 쓰겠다는 게 나의 다짐이다. 동시대 세계 문학에 견주어도 아류, 짝퉁이라는 말 안 듣고 당당하게 인정받고 싶다.
한승희 기자 언제부터 그런 목표를 가지게 됐나?
김영하 1998년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프랑스에 번역 출간되었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어느 문예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언젠가는 내 소설이 터키의 서점에서도 읽힐 것이고 말레이시아나 일본의 서점에서도 읽힐 것이라고 생각하고 쓰고 싶다, 라고 말했다가 파란이 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 문학은 한국인들만 읽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애가 머리 물들이고 귀걸이 하고 나타나서 그런 말을 하니까,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독자들이 한국 문학은 한국어만의 특질이 있는데 번역을 염두에 두고 쓴다는 것은 문체에 문제가 있지 않느냐는 비판도 하고, 욕도 무척 많이 먹었다. 하지만 나는 번역을 고려해서 문장을 쓴다는 의미가 아니라 테마가, 입담이, 이런 이야기가 세계에 내놓았을 때 쪽팔리지 않게 쓰겠다는 의미였다.
박아녜스 기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프랑스어 문고판 표지가 안동 하회 각시탈이더라. 표지가 책의 내용과 전혀 맞질 않는다. 소설은 민족적인 성향을 전혀 느낄 수 없는데 그런 표지를 입는 순간 김영하라는 개별 작가가 전체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느낌이 들었다.
김영하 문학에 있어 국적이라는 건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나라 독자가 알바니아, 터키, 말레이시아 문학 안 보지만 일본 문학은 본다. 특히 소설은 그 나라의 라이프스타일을 따라하고 싶은 욕망이 있을 때 나가는 거다. 무라카미 하루키나 폴 오스터의 소설이 인기 있는 이유에는 그 소설에서 그려지는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동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국적이 중요하다.
박아녜스 기자 그런 대표성을 갖는 작가가 되고 싶나?
김영하 나는 한국 문학에도 미시마 유키오가 유럽에서 했던 역할, 그런 걸 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게 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메이저 리그에 가야할 것이다.
한승희 기자 <검은 꽃>과 <오빠가 돌아왔다> 두 편이 이례적으로 동인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이런 일쯤은 굉장히 사소하게 느껴지겠다.
김영하 그렇다. 그게 목표면 인생이 얼마나 허망하나. 내 꿈은 한국에서 문학상 받는 게 아니다. 내 꿈은 명확하다. 뉴욕이나 파리의 주요 서점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책을 내는 작가가 되는 거다. 아마 이런 고민을 제일 먼저 한 사람은 이문열 선생일 것이다. 이문열 선생은 물론 한국 내에서 할 거 다 하고 나서 그런 생각을 했지만, 나는 좀 더 일찍 그런 생각을 했다. 일찍부터 유럽 여행을 시작해서 일본 작가들의 책이 파리의 주요한 서점들에 죽 깔려 있는 걸 보고 굉장히 부러웠다. 그래서 만약 내가 작가가 된다면 저런 작가가 되리라, 그래야 내 뒤에 오는 후배들도 김영하도 하는데 내가 못하리, 그런 용기를 갖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좀 만만해 보이지 않나?
박아녜스 기자 만만하긴.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김영하 내가 해외에서 입질이 가장 많이 되는 작가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프랑스어판에 이어 독일어 번역이 완료된 상태고, 터키어, 중국어, 영어 번역도 거의 완료되서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 다음에는 단편 선집이 독일에서 나올 예정이고. <검은 꽃>은 아직 번역이 시작되진 않았는데 스페인어와 영어판 계약이 진행되고 있다. 해외에서 가장 반응이 좋은 작품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좀 웃긴데, 우리나라가 국운 상승기 아닌가? 문화라는 게 따로 떨어져 있질 않아서 하나가 잘 되면 줄줄이 운을 탄다. 영화, 드라마, 미술 쪽은 나간 지 오래됐고, 음악도 클래식은 나가서 세계적으로 걸출한 인물들도 냈고, 대중음악도 벌써 다 나갔다. 그런데 못 나간 장르가 딱 두 개 있다. 그게 바로 문학과 만화다. 만화도 서서히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한승희 기자 만화가 이우일과 친하다던데 만나면 주로 그런 얘기를 하나?
김영하 이우일이 말하길 나 같은 사람 처음 봤다더라.(웃음) 내가 이우일을 만나면 ‘우일 씨, 우리는 정말 50이 되고 60이 되면 뉴욕의 매장에서 팔리는 작가가 되자. 우리는 할 수 있어’ 그런다. 꿈을 크게 갖는 게 왜 나쁜가. 사람들이 거기에 대해 냉소적인데 사실은 그게 어리석은 거다.
한승희 기자 꿈은 이루어진다?
김영하 나는 학생들한테도 그런 얘길 하는데 소설가가 되고 싶으면 이미 소설가가 되고, 영화감독이 되고 싶으면 이미 영화감독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남들에게는 그냥 '영화 준비하고 있어요'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스스로는 감독으로서 사고하고 감독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영화감독이 된다. 소설가나 감독이 ‘친구가 원서를 내서 탤런트 됐어요’하는 식으로 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수님이 그랬잖아? 때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준비하고 있으라고.
박아녜스 기자 평소 꾸준히 집필하는 편인가?
김영하 난 아침형 작가다. 아침에 일어나서 시간을 정해놓고 쓰고, 저녁엔 쉰다. 한국 같은 사회에서는 밤에 글을 쓰면 안 된다. 밤에 술 먹자고 연락이 와서 아침에 쓰지 않으면 생산성이 떨어진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밤에 쓰는 걸 좋아하는 작가들이 술도 좋아하는 편이다. 그렇게 하면 하루가 간다. 그렇게 놀아서는 작품이 안 나온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사람은 영화제 같은 데서 친구가 하루 네다섯 편씩 영화 보면, 그거 본다고 뭐 들어오냐? 보면 기억은 나냐? 뭐 이러면서 만날 술 먹고 오후 한두 시쯤 일어나 영화 한 편 겨우 보는 걸 멋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박아녜스 기자 1995년 등단해서 햇수로 10년인데 열심히 해온 것 같나?
김영하 돌이켜 보니 열심히 산 거 같다. 그동안 받은 칭찬 중에서 가장 기뻤던 게 대학 동창 중에 평론가가 된 친구가 ‘너는 갈수록 잘 쓰는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때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갈수록 잘 쓰는 작가가 정말 드물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그런 작가가 돼야 되겠다.
박아녜스 기자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에서는 '담배같이 타인을 중독시키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는데 이번에 <오빠가 돌아왔다>의 서문에는 '투망 던지듯 쓰는 소설이 아닌 낚싯대를 드리우고 기다리듯' 소설을 썼다고 나왔더라. 소설관이 바뀌었나?
김영하 예전에는 '내 얘기 한번 들어봐'라며 혼자 이야기의 권력을 가지고 떠드는 약장사형이었다면 지금은 소설로 대화를 하고 싶다. 독자들이 나름의 의미들을 채울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도 작가의 중요한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나이를 먹어서라기보다는 그게 좋은 소설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리고 13년이나 핀 담배는 끊었다.
한승희 기자 담배 피우고 싶을 땐 어떻게 하나?
김영하 힘차게 박수를 친다. 짝짝!(웃음)
사진 한희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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